검색

[여주마을 구석구석 35] 순조 어머니 수빈 박 씨의 고향 중앙동 가업동

가 -가 +

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10-15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중앙동 가업동 마을 전경.     © 세종신문

가업동의 유래

가업동은 본래 여주군 주내면 지역으로서 가업굴 또는 가업동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가업리가 되었다. 2013년 9월 23일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가업리에서 가업통으로 개칭되었다. 가읍동은 여주읍의 남쪽, 즉 여주읍에서 가남면으로 이어지는 313번 지방도를 따라 교리 다음에 위치한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양지말(양달말)과 음지말(음달말)이 있다. 구전에 의하면 이 마을이 풍수적으로 훌륭한 업(業)을 심을 수 있는 곳이라 하여 가업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양지말은 양달말 이라고도 부르는데 가업리 윗편 양지 바른 곳에 있는 마을이다. 음지말은 응달말 이라고도 부르는데 가업리 초입에서부터 마을 중간 지점까지를 응달말(음지말)이라 한다. 겨울에 그늘이 많고 양지말보다 상대적으로 춥게 느껴지는 동네이다. 
 
소양천이 만든 고래실, 가업동 앞들

소양천은 여주시 연라동에서 시작하여 가읍동 입구에서 굿절천과 만나 북동쪽으로 흐르다 하류부에서 북서방향으로 굽어 흘러 남한강으로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한강수계의 지방하천으로 남한강 제1지류이다. 가업동 앞들은 소양천과 구곡사에서 시작한 굿절천이 만나는 들로 예로부터 물이 풍부하여 농사에 물 걱정을 하지 않는 고래실논이다. 들이 넓지는 않지만 좋은 쌀이 많이 생산되어 가업동 주민들의 먹거리를 보장하는 마을의 옥토다.  

▲ 여주시 중앙동 가업동 소재 고려사찰 구곡사 전경.     © 세종신문

고려사찰 구곡사
 
가업리에서 점봉리(웅골) 가는 중간 지점에 번드레 고개가 나있는데 그 고개 바로 밑에 있는 작은 절이 구곡사(舊谷寺)다. 이 절터의 형상이 마치 소복한 여인이 굿을 하고 있는 모습이어서 굿절이라 하였는데 그 뒤로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구곡사라 부르게 되었다 하고, 지금도 마을주민들은 구곡사보다는 굿절이라는 이름을 많이 쓰고 있다.

구곡사는 또한 가업리사지로 많이 알려져 있는 곳이다. 사찰 내에는 대웅전과 산신각, 요사채가 있고, 사찰 입구에 다른 곳에서 옮겨 왔다는 미륵불이 서 있다. 현재의 사역으로부터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가업리사지의 원터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대웅전은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산령각은 대웅전에서 서북쪽 방향 약 50m 지점에 조성되어 있다. 팔각지붕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아담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대웅전 앞에는 근래에 만든 5층 석탑이 놓여 있다. 기단은 마련되어 있지 않고 상륜부의 구성도 완전하지 않다. 탑신은 정방형의 석재로 비례를 줄여 쌓아 올렸다. 한편 사찰의 입구에 서 있는 구곡사 미륵불로 알려진 불상은 둥근 얼굴과 옷모양이 간략하게 처리되어 친근감을 느끼게 해준다. 높이는 170cm이다.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 씨에 얽힌 이야기

가업동에는 지금도 순조의 외조부이자 정조 빈의 아버지인 박준원의 신도비가 있다. 박준원은 자가 평숙이며, 호는 금석으로 본은 반남(潘南)이다. 1786년(정조 10)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딸이 후궁으로 들어가 수빈이 되자 건원릉 참봉을 거쳐 공조좌랑에 올랐다가 공조·형조판사, 어영대장, 금위대장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한 사람이다. 박준원은 가업동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어느 해 수해가 나서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에 사는 육촌 박명원을 찾아가서 의지하게 되었다. 박명원은 정조의 고모부로 품계는 수록대부에 이르렀다. 그 무렵 정조는 세자가 없었는데 후사를 이을 세자를 얻기 위해 당시 경기감사를 지내던 박명원의 사촌 동생의 딸을 후궁으로 삼으려고 했다. 박명원이 사촌 동생에게 “상감께서 자네 딸을 후궁으로 말씀하시니 자네 의향이 어떤가?” 의사를 물으니 사촌동생은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박준원이 홍수를 피해 식구들을 데리고 한양으로 왔는데 박준원의 딸이 19세로 그의 사촌인 경기감사의 딸보다 훨씬 고왔다. 그래서 박준원에게, “자네더러 이런 소리를 하면 섭섭한 소리 같지만, 다름이 아니라, 금상께서 내 사촌의 딸을 후궁으로 맞으려 하는데 그 사람이 말을 안 들어. 지금 자네 딸을 보니 사촌의 딸보다 훨씬 고운데 자네 딸을 금상의 후궁으로 보내는 것이 어떤가?” 하였다. 박준원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라, “그러시우” 하고 선뜻 대답했다. 그래서 박명원은 정조에게 아뢰기를, “경기감사의 딸보다 내 육촌의 딸이 더 나을 것 같으니 상감께서 친히 보시고 정하십시오” 하였다. 이렇게 해서 정조는 박준원의 딸을 후궁으로 삼았다. 후궁 박 씨는 가례를 올린 후 곧 왕자를 낳았는데 그 왕자가 순조이며, 곧 빈(綬嬪)으로 봉해졌다. 

▲ 가업동 마을 한가운데 있는 박준원 신도비.     © 세종신문

또한 박준원에게 박종경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수빈의 남동생이었다. 박종경은 순조의 외숙이 된다. 순조가 즉위하고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부수찬이 되고 이어서 교리,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를 지냈다. 왕실 외척으로 세도가 당당하던 박종경은 그가 나들이할 때에는 행차가 하도 위엄하고 호화로우며 많은 수행자를 거느리고 다녀서 그가 종로에 나서면 종경 소리가 난다고 했으며 항간에는 다음과 같은 민요가 떠돌았다고 한다. “박덩쿨아 박덩쿨아 성치마라, 윗집 지붕 다 썩는다.” 즉 박종경의 성이 박가이며, 박덩쿨이 자꾸 올라가면 초가집 지붕이 박덩쿨의 그늘에 가려 물이 잘 마르지 않으므로 쉬 썩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항간에서 이런 민요가 유행하므로 수빈이 자기 동생(박종경)에게 말하기를, “세상이란 남보다 우뚝하고 출중하면 적이 많이 생기는 법이다. 그리고 이를 꺾으려고 덤비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너의 세도가 너무 커. 그러니 우리 집 친정이 무사하려면 너무 세도를 부리지 말고 네가 조금 자숙을 해야 되겠다.”고 충고를 할 정도로 그의 세도가 대단했다. 

[마을人터뷰] 이영종(77) 선생

가업동은 어떤 마을인가?

예전에 갑동이라고 불렀다. 옛날 어른들은 갑동이라 불러야 알아 들었지 가업동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양달말과 응당말 두 개의 자연마을이 있었다. 소양천과 구곡사 절에서부터 내려오는 지천이 우리 마을에서 합쳐진다. 굿절에서 시작되는 굿절천은 예전에 송사리와 가재가 정말 많았는데 이마트 물류센터가 들어선 뒤로는 한 마리도 없다. 동네는 저 앞에 소나무들을 옛날 노인들이 방풍림으로 심어놓았다. 그 소나무는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 여주시 가업동 이영종 선생.     © 세종신문

가업동에서 어린 시절은 어땠나?
 
해방되기 전 해에 태어났는데 목숨이 질기니까 살아 있는 거지 그 때 태어난 아이들이 전쟁 통에 많이 죽었다. 우리도 1.4후퇴 때 청주까지 피난을 갔다 왔다. 삐죽한 방가치(벙거지) 모자를 쓰고 갔던 기억이 난다. 솜 보따리 하나를 매고 갔는데 가다가 힘들다고 그것도 안 매고 가겠다고 떼를 썼다고 들었다. 피난을 갔다 오니 우리 집이 엉망이었다. 우리는 남쪽으로 피난을 갔지만 경기 북부 쪽 사람들은 여기로 피난을 와서 살다 보니 집을 다 망가뜨려 놨다. 우리 할머니가 피난 갔다 오시면서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기 산사람처럼 만들어서 지게에 지고 왔다. 죽은 사람은 어디 가서 재워주지도 않으니까 산사람처럼 해서 지고 와서는 방을 얻은 다음에는 인근 산에 갔다가 세워 놓고 다음날 또 지고 가고 했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할머니 시신을 지게에 지고 가업리까지 돌아와서 선산에 모셨다. 청주에서부터 지고 왔으니 우리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효심이 대단하신 거다. 전쟁은 절대로 나지 말아야 한다. 전쟁은 정말 비참한 거다. 
 
평생을 가업동에서만 살았나?

젊어서 객지생활 한 5년 하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여주초등학교, 여주중학교 졸업하고 여주농고를 다니다가 군대를 갔다. 그때는 학교에 제 나이에 들어가는 사람이 드물었다. 학교를 좀 늦게 들어갔는데 학비가 쉽지 않으니까 스무 살에 군대를 갔다. 군대를 갔다 와서 인천에서 취직을 하고 서울로 갔다가 스물아홉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사람은 충남 홍성사람인데 서울서 만나서 결혼식은 고향 가업동에 와서 올렸다. 내가 고향으로 간다고 하니까 내가 좋으니까 그냥 따라 왔다. 허허허.
 
가업동에서 주로 어떤 일을 하며 살았나?

젊었을 때 골프장이 생기기 시작해서 신설공사장에 나가서 일했다. 그때 동네사람들이 다 거기 가서 일했다. 70년대 초반에 그랬다. 골프장을 다 짓고 나서도 골프장에 많이 나가서 일했는데 돈도 안 되고 그래서 78년도에 쿠웨이트에 갔다 왔다. 1년 좀 남짓 있다 왔다. 그때는 그게 돈이 좀 되었다. 집 하나와 땅 좀 장만했다. 쿠웨이트 갈 때는 별 기술도 없었는데 서울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짓는데 가서 벽돌 쌓는 것을 몇 주 동안 연습을 하고 바로 쿠웨이트로 갔다. 그때 쿠웨이트 가면 한국에서 일할 때보다 급여가 한 열배 되었다. 
쿠웨이트 갔다 와서는 새마을 지도자 보고 마을 이장보고 그랬다. 
플친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Share on Google+ band URL복사
댓글

i

댓글 수정 및 삭제는 PC버전에서만 가능합니다.
URL 복사
x

PC버전 맨위로

Copyright ⓒ 세종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