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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36] 골목골목에 추억과 사연이 담긴 중앙동 창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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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10-23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중앙동 창동 일대 전경.     © 세종신문

창동의 유래

창동은 과거 주내면 지역으로 사창이 있어서 창말, 또는 창동이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구장터, 비각거리, 사직당을 병합하여 창리라 하였는데 2013년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창리에서 창동으로 개칭되었다. 현재는 창1, 2, 3통으로 분동되어 있다. 자연마을로는 하리 상설시장이 형성되기 전 1960년대 여주의 옛 시장이 비각거리 남쪽에 있었는데 이 지역을 ‘구장터’라 부른다. 자안당 앞에 철종 때 세도재상 김병기의 송덕비가 있던 마을을 비각거리라고 한다. 중앙통의 혼잡을 덜기 위해 여흥초등학교로부터 2차선 도로를 만들어 비각거리의 옛 모습이 지금은 없어졌다. 가뭄이 심할 때 여주목사가 기우제를 지낸 사직당(社稷堂)이 있는 ‘사직당’ 마을이 있다. 조선시대 여주 감옥이 있었다고 하여 ‘옥거리’라는 마을도 있었다. 철종 때 세도재상 김병기가 이곳에 살면서 ‘자안당’이라 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이 집을 빼앗아 여주군청을 삼았다. 이에 김병기가 바로 옆에 똑같은 집을 짓고 ‘우안당’이라 하니 현재의 여주 교육청 자리이다. 여주초등학교 앞으로 난 거리 주변에 많은 인가들이 모여 있어 이곳을 ‘학교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해방촌은 창동에 새로 형성된 마을로 6·25 때 북쪽에서 피난 온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해방촌’이라 부르게 되었으나 1980년대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실시하여 옛 자취가 사라졌다.

▲ 여주시 중앙동 창동거리에 조성된 벽화.     © 세종신문

추억의 창동골목길 벽화 길로 변신
 
창동 골목길을 걷다보면 여흥로 88번길로 접어들 때 다채로운 벽화로 장식된 벽화골목을 만날 수 있다. 창동 어린이공원과 노인정 주변 골목길에 조성되어 있는 ‘창동벽화마을’은 좁고 어두운 구도심의 골목길을 깨끗하고 밝은 마을 분위기로 바꿔주고 있다. 벽화골목길은 좁고 침침한 창동 골목길을 아름답게 만들어 주면서 범죄예방 및 치안확보에도 기여하고 있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의 평가다. 지난날 창동 일대의 수많은 아이들이 골목길을 걸어 여주초등학교에 등하교를 하던 길이 창동골목길이다. 방과 후에는 좁을 골목길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의 아우성이 정겹게 들리던 그 추억의 골목길이다. 창동 골목길이 정겹고 화려한 벽화 길로 면모를 일신한 조건에서 예술과 먹거리가 결합된 문화의 거리가 조성된다면 창동 골목길은 여주의 또 하나의 자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주상업의 중심 중앙로 한글시장
 
여주의 대표적인 상권은 중앙로 지역으로 여흥동, 중앙동 주민들은 물론 인접한 오학동, 북내면, 강천면, 점동면 주민들도 즐겨 찾는 상권이다. 이곳은 의류·잡화상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데, 아동복, 유아용품, 신발, 속옷, 화장품, 생활용품 할인점, 병·의원, 미용실, 사진관 등 기타 서비스업종이 차지하고 있다. 이곳 상권에는 5일마다 장이 서는데 이때 중앙로는 물론 중앙로 서쪽의 재래시장 지역까지 상가 양쪽으로 노점이 서 장날의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한글시장은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중앙로를 ‘차 없는 거리’로 지정하고, 10~20대들이 좋아하는 문화·예술 공연을 통해 구매 욕구를 촉진시켜 중앙로의 상권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동방쇼핑건물은 중앙로에서 가장 높고(6층) 큰 건물이다. 중앙로가 끝나는 서쪽 사거리에 2차선 도로에는 시내버스가 다녀 유동인구가 많으며, 가구, 약국, 건자재상 등이 있고, 서쪽으로 더 가면 하리 재래시장이 있는데 5일장이 열려 경기도에서 손꼽히는 재래시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 창동 비각거리에 있는 ‘여주 천주교 순교 치명 기념비’.     © 세종신문

여주 천주교 순교 치명 기념비
 
천주교와 여주는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다. 조선 천주교가 태동한 ‘주어사’가 산북면에 있고 여주에서 천주교 박해로 많은 순교자가 나왔다. 여러 가지 사료를 종합해 보면 천주교 여주 순교자들은 20명인데 이들을 기려 여흥로 105번길 비각거리에 가로 150cm, 세로 220cm, 폭70cm의 ‘여주 천주교 순교 치명 기념비’를 세웠다. 이 기념비는 여주대 건축학과 최종철 교수의 작품으로 ‘순교자의 찬가’와 여주 출신의 순교자 20명의 명단이 적혀있고 기념비 상단에는 조선시대 죄수의 목에 씌웠던 칼을 형상한 오석을 배치해놓았다. 천주교 순교자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순교터로 추정되는 창동 비석거리에 순교자 현양비를 여주군과 여주성당에서 공동으로 건립하였다. 순교비에 적힌 곡절과 사연은 조선천주교의 태동이 얼마 험난했는가를 후대에게 알려주고 있다. 순교비에 적인 글은 아래와 같다. 
서울에서 시작된 천주교 복음의 씨앗은 여주로도 퍼져나갔다. 여주 출신의 최창주(마르첼리노)는 1791년 진산사건으로 문초를 받기도 하였다. 1797년 김건순(요사팟), 이중배(마르티노), 원경도(요한)는 정광수(바르바나)를 통해 주문모(야고보) 신부를 만났다. 이들은 주문모 신부의 감화를 받아 ‘지금 마땅히 차고 있던 칼을 풀고 함께 천주교를 행하자’고 맹세하였고 많은 이들을 교회로 이끌었다. 그러나 여주에 천주교회를 세운 후 박해가 계속 되었다. 1800년 부활절에 정종호의 집에서 성가를 부르다 조용삼(베드로) 부자, 원경도의 장인 최창주, 신자가 아니었던 임희영까지 모두 체포되었다. 이들은 여주감옥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는 중에도 복음을 전파하여 임희영은 옥중세례를 받았고, 아버지와 함께 배교했던 조용삼도 회개하고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들은 10월 서울의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고, 조용삼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이듬해 3월 옥사하였다. 1801년 4월에 이중배, 원경도, 정종호, 최창주, 임희영이 여주사형터에서 참수형을 받았으며 정광수 동생이자 동정녀였던 정순매(바르바라)도 7월 고향인 여주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마을人터뷰] 유용화(68) 선생

창동에서 얼마나 살았나?

중앙통 상가 크로커다일이 있는 곳이 우리 집이다. 앞은 상가고 그 뒤에 집이 있다. 나는 그 자리에서 84년부터 페인트가게를 했다. 중앙통이 차 없는 거리가 되면서 차를 댈 수가 없어서 길가로 세를 얻어서 나왔다. 여초등학교, 여주중학고, 여주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와서는 지금까지 창동에서 살고 있다. 우리 아버지도 그 자리에서 종묘상과 잡화상을 했었다. 언제부터 하셨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어렸을 때부터 중앙통에서 가게를 하셨다. 

▲ 중앙동 창동 유용화 선생.     © 세종신문

창동의 옛 모습을 스케치 하면?
 
옛날에는 농협 앞에서 시작하는 중앙통이 여주에서 제일번화가였다. 터미널이 농협시지부 길 건너 오행당약국 자리에 있었고 그 옆에는 극장이 있었다. 여주군민들이 시장을 가기 위해서는 터미널에서 내려서 길을 건너 중앙통을 지나 하리 시장으로 갔다. 장날이면 중앙통에 사람이 꽉 찼다. 터미널과 농협시지부 사이에 분수대도 있었다. 극장 옆에 시발택시 영업소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 자리에 택시가 선다. 여주시청 별관자리가 예전에는 여주경찰서 자리였다. 50년대 후반에 화재로 여주경찰서가 타버려서 지금 자리로 옮겨왔다. 중앙감리교회에서 소양천 끼고 터미널로 가는 길에 ‘도장교’라고 수여선 기찻길 철교가 있었는데 그 근처가 해방촌이었다. 지금의 창3통이다. 시민회관 뒤편 여주여관 자리가 여주역이었는데 거기서 출발한 수여선 기차가 도장교를 지나 여주향교를 돌아 가업동과 연하리 이천거리를 거쳐 매류를 지나 이천으로 나갔다. 소양천이 예전에는 정말 깨끗했다. 하리, 창리 사람들이 다 그곳에서 빨래를 하고 아이들은 여름이면 멱 감고 고기 잡고 그랬다. 72년도 대홍수 때 소양천 제방이 터져 물난리가 났는데 그 때 집이 많이 허물어져 새로 지었는데 지금도 보면 비슷한 집들이 여러 채 같이 있는데 다 그때 지어진 집들이다. 

▲ 옛 사진으로 남아 있는 수여선 여주역.     © 구글 이미지 검색
 
수여선에 대한 어떤 기억이 있나?

수여선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 놈들이 여주이천지역의 쌀과 모래를 실어가기 위해 만든 것이다. 양섬의 모래를 많이 실어갔다. 수여선 기차 대부분이 화물칸이었고 맨 뒤에 여객 칸 하나두개 달고 다녔다. 수여선이 세종로를 가로질러 갔다. 세종로에 철길이 있어 기차가 지나가면 땡강땡강 소리를 내며 건널목 차단기가 내려가고 올라가고 그랬다. 홍문동 현대아파트가 고등학교 자리인데 학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철길 건널목에서 사고도 여러 번 났다. 여주에서 인천이나 서울로 가려면 수여선을 타고 수원으로 가서 수인선을 타거나 경부선 또는 호남선을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김춘석 전 여주시장 아버님도 여주역의 역무원이셨다. 우리 큰아버지도 역장을 하셨다. 
 
여주극장에 대한 특별한 추억은?

여주극장에서 미성년자관람불가 영화를 몰래 숨어들어가 보다 정학 맞는 애들도 더러 있었다. 화장실 쪽 담장을 넘어 들어가고 그랬다. 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에는 전쟁영화가 많았다. 여주극장 자리가 처음에는 군청의 복지관이었다. 나도 영화를 좋아해서 극장에서 영화를 많이 봤다. 학교에서 단체로 가서 영화를 보는 때도 있었다. 극장도 조그만 한데 학생들이 빼곡히 들어가서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두만강아 잘있거라’는 영화의 장면들이 기억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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