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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38] 도농복합도시의 상징 오학동 현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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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0-11-17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오학동 현암동 일대 전경.     © 세종신문

현암동의 유래

현암동은 본래 여주군 북면 옹암동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옹암동, 현저동, 학동 일부를 병합하여 현저와 옹암의 이름을 따서 현암리라 했다. 2013년 여주군이 시(市)로 승격하면서 현암리에서 현암동으로 개칭되었다. 한편으로는 현암동을 매 응(鷹)자를 써서 응암동으로도 불렀는데 이는 매의 형상을 닮은 바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때 매의 머리 부분을 자르고 현암리라 칭했다. 자연마을로는 현암리에서 으뜸 되는 마을로 ‘독바위’ 마을이 있는데 윗독바위와 아랫독바위가 있다. 또한 현암리에 있던 들인 잿말에서 붙여진 ‘잿말’ 마을이 있고 잿말고개가 있다. 독바위 남쪽에 옹기점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점말’도 있다. 싸리산 남쪽에 자리 잡은 ‘고개밑’이라는 마을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싸리산을 관산으로 표기하고 있고, 곳지미산이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곳지미산이 변음 되어 고개밑이 된 것일 수도 있고, 싸리산 고개밑 마을이라 붙여졌을 수도 있다. 고개밑 동쪽에는 ‘평장’마을이 있는데 의병들이 일본군을 평정해서 불리게 된 이름이라 한다. 남한강 옆에는 ‘수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수촌 앞에는 팔대숲(바다숲, 북숲, 파다수, 팔대수)이 있었다. 숲의 길이가 4km나 되었다는데 그 옛날 여주팔경의 하나다. 
  
독바위

지금은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없어졌는데 독바위는 현암동을 대표하는 바위였다. 원래 이름은 돗바위로 마을 뒷산에 있는 바위가 마치 버섯이 돋아난 모양을 하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독바위 아래 형성된 마을을 독바위 마을이라고 부른다. 옛날에 이 마을은 싸리산에서 생산된 점토 흙으로 독을 구웠다고 전해진다. 남한강 뱃길을 따라 흘러가다보면 팔대장림 너머 나지막한 산 중턱에 우뚝 솟은 바위가 독바위였다. 현암동의 아이들이 숱하게 올라 강을 내려다보며 꿈을 키웠을 독바위,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이름도 아련한 기억 속으로 저물고 있다. 

▲ 학동나루터 자리에서 바라본 여강.     © 세종신문

팔대장림
 
현암동 앞 강변에 그림자를 비치는 아름답고 무성한 숲이 있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역사속의 숲, 바로 팔대장림이다. 임진왜란 당시 원호 장군이 이끄는 조선병사들이 한양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왜적과 싸운 곳이기도 하다. 강변에 비치던 숲의 그림자가 아름다운 풍광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이 살아있는 호국의 숲이었다. 
팔대장림은 길이 4km, 폭 400m에 달하였던 강변 숲으로 고지도인 광여도에 기록되어 있으며 숲의 이름이 지도에 표기되는 경우는 매우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있다. 세종실록 11권, 세종 3년 2월 27일 경신년 기록에는 ‘여흥 팔대 숲에서 점심을 먹는데 술을 차리니, 효령 대군 이보·우의정 이원 등이 모시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 현암동 마을 입구에 서 있는 향나무.     © 세종신문

현암동의 상징 향나무
 
현암동 320-2번지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200년 가까이 된 향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서 있다. 마을 노인들 말로는 이 향나무의 수령이 300년도 더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현암동 마을입구 마을회관 옆에 서 있는데 밑동은 곧게 뻗어있으나 위의 가지가 균형 있게 자라지 못하였다. 일부 가지는 고사되었으며 주변에 스테인리스 보호시설이 되어 있다. 옛날 우리 시골 동네 우물가에는 꼭 향나무가 몇 그루씩 있었다. 그리고 물을 길러 모인 아낙네들은 그 향나무아래에서 웃음꽃을 피우며 얘기들을 나누었다. 처녀 총각들의 사랑이야기, 매섭고 매서운 시집살이 이야기 등 즐겁고 슬픈 온갖 사연들을 우물가의 향나무는 들어왔을 것이다. 현암동 향나무는 동네의 산증인으로 지금도 현암동을 지키고 있다. 

도자기 공장

여주도자기는 여주에서 생산되는 청자, 백자, 분청 등 천년의 전통과 그 맥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여주의 도예촌은 강 건너 서북쪽으로 오금동, 현암동, 오학동와 천송동, 지내리 일대에 약400여개의 도자기 공장 및 300여개의 개인 전시관이 밀집되어 있다. 기록에는 고려 초부터 도자기가 제조되었고 조선조 초기부터는 도자기 공업이 발달 하였는데, 이것은 현암동에 위치한 싸리산을 중심으로 점토, 백토, 고령토 등 전국에서 제일 좋은 도자기 원료가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1932년 기록에는 연간 시가로 약15억 원에 달하는 생산성을 갖추고 있어 전국최대의 도예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현암동을 비롯한 여주지역에 형성된 도예촌에는 도예가들이 전승도예를 깊이 연구하면서 독특한 기법으로 신작을 개발. 청자, 백자, 분청, 와태 등 다양한 종류의 작품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제기, 화분, 식기, 찻잔과 접시 등 실생활에 필요한 용품을 대량생산 해 왔다. 여주 읍내에서 바라보면 현암동 일대 도자기 공장 굴뚝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 마저도 이제는 가물가물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 1960년대 여주군청에서 바라본 현암동 도자기 공장.     © 세종신문


마을人터뷰 조종수(83)·김호중(83) 선생

[조종수 선생]
현암동에 터전을 잡은 지 얼마나 되었나?

현재 4대째 살고 있다. 할아버지, 아버지, 나, 아들 이렇게 살고 있다. 우리 집안 조 씨가 원래 본적이 여기 여주다. 할아버지께서 어떻게 현암리로 들어오셨는지는 잘 모른다. 현암동도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마을 모양이 싹 바뀌었다. 반은 도시고 반은 농촌이고 그렇다. 
 
어린 시절 기억은 어떤 것이 있나?
여주초등학교를 다니다 그만뒀다. 저 아래 모텔 밑 학동나루에서 배를 타고 여주군청 뒤로 곧장 건너다녔다. 그 때는 일본 놈들 시절이니까 여주초등학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일본 놈 빽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내가 세 살 먹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집안이 너무 어려워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월사금을 못 내고 있었는데 선생은 맨날 집에 가서 월사금 가져오라고 집으로 쫓아버리고 집에 가봐야 월사금을 줄 형편도 사람도 없고 그냥 맨날 현암동 주변 산이나 강가에서 놀다가 들어가고 그랬다. 이 일대가 맨 산이고 들이고 강이고 그랬다. 
 
학동나루는 어땠나?
저기 강에 얼음이 사람이 건너다닐 정도로 꽁꽁 얼지 않았을 때는 사공들이 얼음을 톱으로 잘라서 뱃길을 내서 건너다니고 그랬다. 그것도 밤에는 얼기 때문에 작은 매사리 배로 흔들흔들하며 왔다 갔다 하면서 밤새 어는 얼음을 깼다. 사공들이 참 고생을 많이 했다. 

▲ (왼쪽) 여주시 오학동 현암동 김호중 선생. (오른쪽) 조종수 선생.     © 세종신문

[김호중 선생]
현암동이 고향인가?

고향은 이북이다. 강원도 회양군이 고향이다. 해방되고 바로 내려왔다. 초등학교는 여기에서 다녔다. 나만 북쪽에서 태어났고 동생들은 다 여기 현암동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는 좀 늦게 들어갔는데 4학년 때 6.25전쟁이 났다. 북내초등학교를 다녔는데 걸어서 버시고개를 넘어서 다녔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대신중학교를 다니다 그만 두었다. 형편이 다 어려워서 그랬지 뭐….
 
현암동에 도자기 공장이 많이 있었나?

나도 도자기 공장에 다녔다. 처음에는 심부름정도 하다가 차츰차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돈도 얼마 안줬다. 몇 백 원 줬던 것 같다. 한 달 내 일하면 쌀 반말정도 벌었다. 기술자가 되면 좀 많이 받고 그랬다. 그 때는 여주에 일거리가 없다보니까 대부분 도자기 공장에 다녔다. 도자기 공장일이 정말 힘들었다. 지금은 기계로 하지만 그때는 전부 인력으로 했다. 대부분 밥그릇 국그릇 그런 건데 그때는 그릇이 두꺼워 정말 무거웠다. 
 
도자기 공장으로 매우 번성했다고 하던데….

현암동은 도자기 공장이 많아 돈이 좀 돌고 그래서 상당히 번화가였다. 학동나루 주변에는 술집들이 여러 곳 있었다. 몇 푼 되지도 않는 월급 하룻밤에 다 날린 적도 있다. 
결혼은 스물 세 살인가 네 살에 했다. 집사람은 전라도 정읍이 고향인데 도자기 공장에서 만났다. 여태 같이 살다가 얼마 전에 먼저 떠났다. 곧 첫 제사가 다가온다. 나보다 두 살 어린데 알음알음 해서 여기 여주까지 왔다가 나를 만나 결혼해 평생을 살았다. 공장 직원들끼리 친목회를 만들어 쉬는 날 여행을 많이 다녔다. 월남(베트남)에 여행을 갔다 온 적도 있다. 여주는 신륵사로 데이트를 다니고 그랬다. 나룻배 타고 강 건너 여주읍내로 나가기도 했다. 
플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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