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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마을 구석구석 44] 미군부대로 생겨나 영릉의 품에 사는 능서면 번도5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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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춘 기자
기사입력 2021-02-10

[여주세종문화재단-세종신문 공동기획]

▲ 여주시 능서면 번도5리 마을 전경.     © 세종신문

번도5리의 유래

번도리는 본래 여주군 길천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번두리와 도동을 합하여 번도리라 했다. 능서면 면소재지 마을로 자연마을에 따라 번도1~5리로 행정리가 분할되어 있다. 자연마을 말마댕이는 번도1리로 고려 말 경 교통수단이던 말이 쉬어가는 장소인 역마가 있어 말마당으로 불렀다고 한다. 번머리는 번도2리 마을로 벌[坪]의 윗부분에 위치한 마을로 약 500여 년 전 남평 문씨가 이곳에 낙향하여 살았다고 하는데 당시 마을의 형상이 북쪽과 남쪽으로 산림이 울창하여 번매동으로 불렀다고 한다. 속칭 번머리라고 한다. 안양동은 번도3리 마을로 번머리와 같은 곳이었다. 독골은 도곡동이라고도 불렀는데 말마댕이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번도4리 마을이다. 번도5리는 부대촌(部隊村)으로 도깨비가 나온다고 해서 ‘도깨불’이라고도 불렸다. 번머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6.25전쟁 직후에 생긴 부락으로 군부대의 주둔으로 인하여 생긴 마을이다.  

▲ 홍살문에서 바라본 영릉.     © 세종신문

세종대왕 영릉
 
영릉은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릉으로 능서면 번도리와 왕대리에 걸쳐 있다. 영릉은 본래 세종의 생전 바람에 따라 태종의 능역 서쪽에 있었으나 묏자리를 두고 후손이 끊어진다는 논란이 계속되었다. 세종의 장남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승하했고, 문종의 장남 단종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와 예종의 장남 인성대군도 요절했다. 이 때문에 예종 때 영릉을 여주로 이장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당시 영릉 이장 자리에는 우의정을 지낸 이인손의 무덤이 있었는데, 야사에 따르면 무덤 자리를 양보해달라는 예종의 청을 받아들인 이인손의 후손들이 묘를 파자 '이 자리에서 연을 높이 날린 다음 줄을 끊어 연이 떨어지는 자리로 이장하라‘는 지석이 나왔고 후손들이 이를 따르자 연이 떨어진 자리도 명당이어서 가문이 계속 번성했다고 한다. 영릉은 천하의 대명당으로 풍수가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대단한 자리이다. 일설에는 세종 같은 성인을 이러한 대명당에 모셨기 때문에 조선 왕조의 수명이 100여 년은 연장되었다는 소위 '영릉가백년(英陵加百年)‘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다. 세종대왕의 영릉은 조선의 역대 왕릉 중에서 마지막으로 신도비가 세워진 능이기도 하다. 조선의 왕릉에서 신도비가 세워진 능은 건원릉(태조), 후릉(정종), 헌릉(태종)과 영릉뿐이고 그 이후의 왕들은 신도비가 없다.

▲ 능서면 번도5리에 남아있는 영릉 망배소.     © 세종신문

망배소
 
능서면 번도리 산3-15번지 42번 국도변에 길을 지나다니던 백성들이 세종대왕릉을 바라보며  참배를 했던 ‘망배소’가 자리 잡고 있다. 번도리 마을 노인의 말에 따르면 아주 옛날에는 망배소라는 표지석과 함께 자그마한 누각이 있었다고 하는데 주변이 개발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 후 2009년 여주시에서 1천500만원의 예산을 들여 100㎡에 관광객들의 참배를 위해 가로·세로 3m 넓이의 석축을 쌓아 망배소를 복원했다. 망배소에서 정북방향으로 약1킬로미터 전방 골짜기 안쪽에 영릉이 위치하고 있는데 망배소 전방을 가리고 있는 건물을 돌아가면 영릉이 어렴풋이 보인다. 2014년 12월 여주시의회에서 능서면 번도리 공군부대 이전에 따른 활용방안을 설명하면서, 능서역과 북성산, 월송동 삼밭골, 망배소, 영릉과 연결하는 옛 세종대왕 참배 길을 복원 조성하여 관광 상품을 개발하는 계획이 나왔을 뿐 아직도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있다. 오늘날 영릉 망배소는 관리가 잘 이뤄지지 않고 주변의 상업건물들에 가로 막혀 망배소의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 1970년도부터 운영 중인 대풍상회.     © 세종신문

미군부대와 대풍상회
 
번도5리는 한국전쟁 후 주둔하게 된 미군부대와 함께 만들어진 마을이다. 번도5리에 주둔한 미군부대는 유도탄부대로 1958년경부터 1978년경까지 약 20년 동안 주둔한 부대로 약 250여명의 미군이 있었다고 한다. 70년대 말 미군이 떠난 이후에는 육군 방공포대가 주둔하였고 그 이후 방공포대가 공군으로 이양되었고 최근 부대가 전부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번도5리에 미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미군을 대상으로 술집과 살롱을 하기 위해 외지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여 번도5리가 생겼다. 70년대 말 미군이 떠나면서 술집과 살롱은 없어졌지만 영릉 성역화 사업으로 세종대왕릉을 찾는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번도5리는 영릉관광의 첫 관문이 되었다. 번도5리는 미군부대로 생긴 마을이고 영릉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마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군부대 맞은편에는 70년도 후반부터 장사를 시작한 잡화점 대풍상회가 지금도 문을 열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을人터뷰] 고종배(81) 선생

번도5리에서 얼마나 살았나?

나는 1941년 강원도 원주에서 3형제 중에 막내로 태어났다. 우리 가족들이 6.25전쟁 때 피난 갔다 오다가 여주에 정착을 했다. 원주에서 나와 남한강을 건너 보은, 옥천까지 가서 거기 잠깐 있다가 어머니하고 같이 올라오면서 여주에 정착했다. 처음에는 창리 비각거리에서 한 1년 살다가 여기 번도리로 왔다. 원주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여주로 와서 여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여주중학교를 다녔는데 2학년 때 형편이 어려워 그만뒀다. 

▲ 능서면 번도리에서 대풍상회를 운영하는 고종배 선생.     © 세종신문

마을을 ‘부대촌’이라고 불렀다는데 미군부대 때문에 그렇게 불렸나?

우리가 이 마을에 처음 왔을 때는 조그만 집이 세 채가 있었다. 학교 다닐 때는 여기가 솔밭 산이었다. 1958년도에 미군부대가 들어오면서 부락이 커졌다. 미군부대가 있을 때는 지금 이 가게자리가 양복점이었다. 이 마을은 일종의 기지촌이었다. 양색시들도 많고 빠도 세 개가 있고 당구장도 세 개가 있었다. 그 때 학고방을 짓고 어디서 왔는지 양색시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번도5리 사람들은 미군부대에서 일하며 벌어먹고 살았다. 미군들 빨래 해주고 양색시들 빨래 해주고 받은 돈으로 생활을 했다. 나도 젊었을 때 미군부대 안에 있는 당구장에서 청소하고 돈 벌고 그랬다. 유도탄부대라고 했는데 1978년경에 떠났다. 미군부대 있을 때는 마을이 지금보다 훨씬 컸다. 여기가 여주에서 잘나가는 번화가 중에 한 곳이었다. 우리 집사람도 미군들 빨래를 해 주고 돈을 벌었는데 한 달에 10달러를 받았다. 양색시도 이 마을에 250여명 되었다 미군 숫자보다 색시들 숫자가 더 많을 때도 있었다. 그래서 이 부락이 커 진거다.
 
번도5리에서 결혼하고 가정도 꾸렸나?

우리 집사람은 전라도 고흥에서 배타고 들어가는 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나는 그 곳에 평생 딱 두 번 가 봤는데 지금도 어딘지 잘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 어머니, 오빠, 언니들이 곤지암으로 이사를 왔다. 어느 날 집사람이 영릉에 구경을 왔다가 우연히 나를 만났다. 그 당시 미군부대에서 사온 자전거를 타고 영릉에 내려갔더니 집사람이 친구랑 둘이서 구경을 왔었다. 영릉 앞에 연못이 있는데 먹거리를 파는 노점이 있었다. 거기서 우리 집사람을 만났다. 내가 어디 사냐고 물었더니 곤지암에 산다고 그러더라. 그 후에 내가 곤지암으로 갔다. 곤지암에서 백사 쪽으로 한참을 가야 하는 완전 산골이었다. 처음에 나오라고 했는데 나오지 않더라. 그 다음에 또 찾아갔다. 우리 집사람은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네 살 밑에 남동생이 하나 있었는데 그 사람이 보더니 “들어오세요” 그러더라. 집에 들어갔더니 아버지도 안계시고 어머니만 계셨다. 큰 언니가 “우리가 이렇게 못 산다고 무시해서 그러느냐”고 그래서 “그거 아니다. 나는 결혼하고 싶어서 왔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큰처남은 서울로 돈 벌로 가고 집에 남자라고는 작은처남 하나고 다 여자들만 있었다. 인사를 했더니 장모님이 허락을 하셔서 만난 지 6개월 만에 결혼했다. 결혼하고 여기 번도리로 장모님이 오셨다가 마을에서 흑인 미군을 처음 보고는 깜짝 놀라셨다. “워메! 사람이냐”고 그러셨다. 태어나서 흑인을 처음 보셨으니 얼마나 놀랐겠나. 처음에는 우리 집사람도 기겁을 했다. 그랬는데 그 미군들 빨래 다 해주고 그랬다. 미군들 떠나고는 집사람이 나랑 같이 구멍가게 하면서 평생을 고생하다 재작년에 세상을 떠났다. 
 
아직도 가게를 열고 있는데 장사가 잘 되나?

남자는 여자 앞에 가야 한다. 집사람 먼저 보내고 혼자 산다는 게 정말 힘들다. 우에 집은 일주일에 한번 가서 잔다. 이 가게 방을 우리 집사람이 매일 지켰는데 집사람이 떠나고 내가 지키고 있다. 집사람이 없으니까 하루에 만원어치도 안 팔리지만 그래도 문을 닫을 수 없어 매일 가게 문을 열고 있다. 집사람도 우리가 같이 일한 가게라 그런지 세상을 뜨면서 가게를 절대로 팔지 말라고 하더라. 미군부대가 떠나고 영릉이 성역화 되면서 관광객들이 전부 우리 가게 앞을 지나서 영릉 후문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구멍가게지만 한때는 정말 장사가 잘 되었다. 한글날 그럴 때는 사람이 미어 터졌다. 흙벽돌로 지은 가게에서 막걸리도 팔고, 라면도 끓여서 팔고 그랬다. 우리 집사람이 그렇게 알뜰살뜰 가꾸고 정들였던 곳이다. 그 사람이 죽기 전까지 여기 앉아서 장사를 했다. 우리 집사람이랑 같이 처음 가게를 열고 평생 같이 장사를 하다 집사람은 떠나고 나 혼자 이렇게 지키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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